본문 바로가기
집중탐구

할많하않의 민족[4]: 청원의 역효과

by 깔로 2022. 11. 11.
반응형

깔로~🖐️🖐️

※ '할많하않'이란?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를 줄인 말로서, 말이 통하지 않거나 말하는 것이 의미 없는 경우를 표현하는 신조어

 

2주 전, "할많하않의 민족[2]: 아무말 대잔치?" 편에서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왔던 선 넘은 청원 사례를 몇 가지 소개했었어요. 이런 선 넘은 청원들은 경우에 따라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도, 혹은 어이없는 웃음을 유발하기도 했었지만, 이 중 실제로 많은 동의를 받아서 사회적 공론화가 된 청원은 없었어요. 우스꽝스럽거나 당황스러운 청원은 그냥 웃고 넘기지만, 사회적으로 필요한 청원에는 적극 동참하는 우리 국민의 상식 수준을 엿볼 수 있었던 대목이죠.

이러한 국민들의 상식 덕분에 청와대 국민청원은 더욱 큰 무게감을 지닐수 있었고, 많은 분들이 동참을 했던 청원들은 성공적으로 공론화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러한 국민들의 동참이 항상 좋은 결과만 있었을까요?

오늘은 국민들의 청원 참여가 문제가 되거나 또는 문제의 소지를 발생시킨 경우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아요.


▶ 무분별한 여론몰이

청와대 국민청원과 같은 온라인 오픈 청원 사이트의 순기능은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과 같이 상대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편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이러한 의견이 공론화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에요. 하지만 종종 이러한 순기능이 반대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어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무분별한 여론몰이이죠. 

과거 청와대 국민청원에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의 사연이 올라왔을 때, 수사기관과 사법 당국에서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가려내기 전에 국민청원 동의 수를 앞세워 국민들 사이에서 여론재판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어요. 

가장 대표적인 예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대한민국 여자 팀추월 대표팀 논란'이 있어요. 당시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팀추월 준준결승 경기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김보름, 박지우, 노선영 선수가 서로 간에 큰 거리 차이를 내며 결승점에 들어왔어요. SBS 해설위원들은 이를 잘못된 경기 운영이라고 지적하고, 이를 통해 김보름 선수가 노선영 선수를 왕따시켰다는 의혹이 불거졌어요. 그리고 한국 빙상연맹은 이러한 의혹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내어놓지 못하여 김보름 선수가 노선영 선수를 왕따시킨다는 소문은 기정사실화되었고, 급기야 청와대 국민청원에 '김보름 선수가 의도적으로 노선영 선수를 따돌렸다'라며 '김 선수의 선수 자격을 박탈해 달라'라는 청원이 올라왔어요. 언론의 자극적인 기사와 이러한 청원 내용은 무분별한 여론몰이로 이어졌고, 급기야 해당 청원에 6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동의하는 일까지 벌어졌어요.

 

(출처: 뉴스1)

 

이러한 사건과 여론몰이로 인해 김보름 선수와 노선영 선수는 급기야 서로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재판 진행에 따라 사건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오히려 피해자는 김보름 선수라는 것이 밝혀졌어요. 김 선수는 노 선수로부터 7년 넘게 폭행 및 폭언을 당해왔었고, 평창 올림픽 당시 경기 운영은 지극히 정상적인 주행이었다는 점이 밝혀지게 되었죠. 

자극적인 청원 내용과 정확한 검증 없이 이를 공론화 시킨 언론에 의하여 한 개인에 대한 무분별한 여론재판이 이뤄졌던 안타까운 사건이었어요. 

이 외에도 '이수역 폭행사건'의 경우,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며 엄벌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을 올렸고, 이는 젠더 갈등으로까지 번졌지만, 경찰 수사 결과 여성이 먼저 남성의 신체를 건드린 것이 결국 확인되었어요. '곰탕집 성추행 사건' 또한 아내가 가해자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30만 명에 가까운 동의 수를 얻었고 피해자에 대해 '꽃뱀' 등의 단어를 사용한 무분별한 여론재판이 있었지만, 수사 결과 남편의 가해사실이 확인되었어요.

 

 

이처럼 청원은 검증되지 않은 사실에 대해 무분별한 여론몰이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도구이기도 해요.

 


▶ 조급했던 입법 

법이란 우리 사회가 어떻게 운영되고 사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정하는 아주 중요한 기준이에요. 이 때문에 법을 새로 만들거나 고치고 혹은 폐지할 때,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여러 상황들을 복합적으로 검토 및 고려하여 결정해야 해요. 하지만 청원 내용에 따라 여론이 형성되어 버려 충분한 검토 없이 조급하게 법이 바뀐 사례들이 있었고, 이 때문에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거나 더 큰 혼란을 야기했던 사례들이 있어요. 

가장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민식이법'이에요. 민식이법은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일곱 살 김민식 군이 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계기가 되었어요. 당시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어린이보호구역 내에서 사고가 일어날 경우 운전자 처벌을 강화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이 올라왔었고, 이는 국민적 여론을 결집하는 역할을 했어요. 

물론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운전자 처벌을 강화해달라는 청원의 취지 자체는 좋았으나, 결집된 여론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국회에서는 여론에 떠밀려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하지 않고 조급하게 민식이법을 통과시켰어요. 민식이법 통과 이후 도로에 아이들이 일부러 뛰어드는 등의 악용 사례가 꾸준히 발생했지만, 입법 당시 이러한 악용 사례에 대해 충분한 검토와 대응 방법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꿎은 운전자가 아이들의 장난으로 인해 범죄자가 되어버리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어요. 이 때문에 민식이법을 개정해 달라는 국민청원 또한 다시 올라왔고, 35만 명 이상이 동의했던 사례가 있어요. 

또한 사회적으로 엄청난 주목을 받았던 고 윤창호 씨 사건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왔던 윤창호 씨가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사망하자, 부모와 가족은 청와대 국민청원에 억울함을 호소했어요. 해당 사건이 알려지자 국민적 여론이 들끓었고, 정치권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음주운전 처벌을 강화하는 윤창호법을 빠르게 통과시켰어요. 

윤창호법의 취지는 매우 좋았으나, '비례의 원칙'이라는 법률의 가장 기초적인 원칙마저 제대로 논의되지 않고 조급히 통과된 바람에 윤창호법은 결국 2021년 12월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결을 받았어요. 그리고 이로 인해 기존에 윤창호법으로 처벌받았던 사람들 사이에 누구는 재심을 청구해 형이 감경되고 누구는 감경되지 않는 등 막심한 혼란을 야기했죠. 

윤창호법이 좋은 취지였던 만큼, 처음부터 차근차근 제대로 논의되고 설계되었다면 음주운전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좋은 법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 여론에 떠밀려 조급히 통과되는 바람에 혼란만 야기하게 됐다는 사실이 굉장히 안타까울 뿐이죠. 


▶ 정치 싸움의 장

문재인 정부 중반 이후로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정부에 대한 질문 및 건의나 사회적 약자 또는 소외계층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라기보단, 무분별한 정치 싸움이 일어나는 장으로 바뀐 감도 많았어요.

특히 조국 전 장관의 법무부 장관 임명을 놓고 찬성 및 반대 청원이 팽팽히 맞서며 기싸움을 했으며,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의 갈등 상황에서도 양 진영은 공격적으로 지지자를 끌어들이며 치열한 전투를 벌렸어요. 

문제인 대통령 탄핵 촉구 청원이 올라오면, 반대쪽에서는 문재인 대통령 응원 청원이 올라오고,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해체 청원이 올라오면 더불어민주당 해산 청원이 올라오는 등,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고 의미 없는 소모성 정치 청원들이 어느 순간 청와대 국민청원을 뒤덮기 시작했죠. 

그리고 이러한 청원들에 압도적으로 많은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동의를 하고 상대 진영을 공격하기 시작하니, 정작 중요한 사회 문제를 다루거나 사회적 약자 또는 소외계층의 목소리는 죄다 묻혀버리고 말았어요. 

국민청원은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던 중요한 문제들을 공론화 시키는 순기능이 있었으나, 종종 이러한 순기능이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키고 부작용을 낳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어요.

 

국민청원은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던 중요한 문제들을 공론화 시키는 순기능이 있었으나,
종종 이러한 순기능이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키고 부작용을 낳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어요.

 

'할많하않의 민족[5]'에서 계속...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