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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할많하않의 민족[1]: 할 말은 항상 많았다

by 깔로 2022.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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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로~🖐️🖐️

 

대한민국에 한 온라인 사이트가 있었어요.

 

대한민국 전 국민의 93%가 이 온라인 사이트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전 국민의 63%가 이 온라인 사이트에 접속하여 참여해 본 적이 있었죠. 이 사이트에는 하루 평균 33만 명의 이용자들이 방문했고 725건의 새로운 게시글이 올라왔었어요.

 

혹시 이 온라인 사이트가 어디인지 짐작이 가시나요?

 

네, 이 사이트는 바로 2018년 8월 19일 시작되어 2022년 5월 9일 서비스 종료된 '청와대 국민청원'이에요.

 

앞으로 향후 몇 주간 "할많하않의 민족" 연재를 통하여 우리나라의 청원과 사회참여 현황을 짚어보도록 해요!

 

-할많하않: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를 줄인 말으로서, 말이 통하지 않거나 말하는 것이 의미 없는 경우를 표현하는 신조어

 

 


▶ 청원을 하는 이유?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억울하거나 분통한 일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이러한 일들을 해결하기 위한 법적 절차를 마련해 놓았죠. 하지만 이 세상에는 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더 많아요.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건들의 대표적인 유형으로는 (1) 경험한 사건이 위법 행위가 아닌 도덕/사회통념적으로 부적절한 사건이거나, (2) 소송 과정이나 비용 등을 따져 보았을 때 배보다 배꼽이 큰 경우, 또는 (3) 자신이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경우 등이 있어요.

 

설사 내가 경험하거나 목격한 억울한 일이 법적으로 해결할 수 없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사건을 최소한 주위에 알려서 공론화하길 원해요. 나의 억울함을 타인에게 하소연함으로써 공감 및 위로를 얻고, 추후에 이러한 일이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청와대 국민청원'은 뜨거운 관심을 받았었어요.

 

본래 청원의 사전적 의미는 '국민이 국가기관에 대하여 의견이나 희망을 개진하는 것'이에요. 청원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이 지닌 기본권 중 하나로 국민이 불만 또는 희망 사항을 개진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행위이죠.

 

사실 '청와대 국민청원'은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라는 철학으로 국정 현안과 관련하여 국민들이 질문을 하거나 의견을 개진하면 이에 대한 정부의 답변을 제공하려는 취지로 시작되었었어요.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국민들이 자신이 겪은 억울한 일이나 사회 부조리를 신고하고 공론화하는 채널로 사용하기 시작했죠.

 

 

 

▶ 할많하않 민족의 청원 역사!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의 틀을 다진 것은 광복 이후이지만, 사실 청원제도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었어요.

 

조선시대였던 1401년,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태종은 '신문고'라는 북을 설치했어요. 백성들은 억울하거나 원통한 일을 겪을 경우 신문고 북을 두드리고 사건을 접수함으로써 왕에게 직접 사건을 아뢸 수 있었죠. 원칙적으로 신문고를 두드려 접수한 사건은 5일 이내에 응답하도록 되어있었어요. 만일 담당 관리의 실수나 게으름으로 해당 기간이 경과하게 될 경우, 담당 관리는 사유서를 써야 했고 사안에 따라서는 징계를 받을 수도 있었어요.

 

물론 신문고 제도가 조선시대 내내 활성화되어 있던 것은 아니에요. 세조나 연산군 시대에는 신문고 제도가 폐지되었었고, 임진왜란 등의 큰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는 명목상 신문고가 존재는 했지만 사실상 죽어있는 제도와 다름없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말기까지 신문고 제도는 그 명맥을 이어왔었고, 백성들이 억울함과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었어요.

 

 

조선시대에는 신문고 외에도 '격쟁'이라는 제도가 있었어요. 격쟁은 '징(또는 꽹과리)을 친다'라는 의미인데, 일반 백성들은 왕이 행차할 때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행차를 멈춰세우고 왕에게 직접 자신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전달할 수 있었어요. 수원화성을 지은 것으로 유명한 정조대왕이 격쟁을 가장 활발히 활용한 왕이라고 알려져요. 특히 당시로서는 결코 짧지 않은 한양에서 수원까지의 행차 중간중간 많은 격쟁들이 있었다고 하네요.

 

물론 조선시대에 선비들은 누구나 왕에게 상소를 올려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왕의 잘못이나 불합리한 사회 제도를 비판할 수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까지 '신문고'나 '격쟁'을 통하여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점은 조선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음에도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를 역으로 말하면, 우리 선조들 또한 할 말이 많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려는 시도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를 역으로 말하면,
우리 선조들 또한 할 말이 많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려는 시도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할많하않의 민족[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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